[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장편소설 ‘바람벽’을 집필하며
때(時)는 오고 간다. 애타게 그리워해도 지워진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마음 떠난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때(時)는 시간의 어떤 순간이나 부분이다. 어떤 일을 하기에 좋은 기회나 알맞은 시기를 말한다. 베스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멸망한 폼페이에는 화산재가 덮칠 당시 그 모습 그대로, 살아있는 듯 죽은 사람들이 엉겨 붙어 있다. 연인들은 서로 껴안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하고, 만삭의 어머니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바닥에 배를 깔고 웅크리고 있다. 너무 생생해서 금방이라도 화산재를 뚫고 걸어나올 것 같다. 참고 기다리면 때(Time)가 온다. 썰물처럼 떠내려 간 생의 편린들이 무채색의 바다를 거슬러 밀물처럼 몰려온다. 바다는 원래 푸른 빛이었을까? 자음과 모음이 엉겨 붙은 파도는 저녁 노을에 활화산처럼 타오른다. 마지막은 찬연하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순간의 불꽃놀이다. 성냥개비나 불쏘시개로 사라진다 해도, 스러지고 다시 일어나, 길 위에서 길이 되는 사람들의 언어를 진솔하게 적고 싶었다. 오래 전 자전소설 두 권과 자전에세이를 출간했다. 자전소설 ‘찔레꽃’은 소설의 형식을 갖추지 못해 서술에 가깝다. 자전에세이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은 이기희 삶을 그린 투영도(投影圖)다. 장편소설 두 권을 정말 쓰고 싶었다.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나락으로 꼬꾸라져도 목숨줄 놓지 않는 사람들의 싱싱한 언어를 담고 싶었다. 20년 가까이 한 주도 빠짐없이 미주중앙일보에 칼럼을 썼다. 사업하며 아이들 키우면서 밤잠 설치며 글쓰기 연습을 했다. 마감 시간 안 놓치려고 수술 받은 날은 가슴을 동여매고 글을 쓰고 어머니 장례식 날은 눈물로 자판기를 두드렸다. 인생의 반을 지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쓰고 싶은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문제는 구성 즉 플롯이다. E.M 포스트는 ‘소설의 이론’에서 플롯은 사건들 간의 필연적 연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스토리와 구분된다고 설명한다. 무식은 실력 부족으로 유식을 이기지 못한다. 소설다운 소설을 한 편도 쓴 경험이 없어 맨 땅에 헤딩하다 지렁이 잡는 실수를 범하게 될까 두렵다. 작가는 실제 있는 것들을 쓰지 않는다. 입히고 꾸미고 각색하고 분탕질하며 창작의 꽃을 피운다. 백마 탄 왕자와 결혼해 무명시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시나리오는 유명 영화감독 신춘문예 당선작의 소재로 비난의 대상이 됐다. 베스트셀러 소설가 작품들 속에도 사랑을 버린 여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텃밭에 뿌린 씨는 싹이 트면 푸릇푸릇 잎이 돋아난다. 이방인으로 남의 땅을 떠돌아도 그리움이 얼룩진 씨앗 한 톨 땅 속 깊이 묻으면 수만 수천개로 번져나간다. 디아스포라는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의학적으로 파종은 다른 장기로 전이된 것으로 족보에서 종통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꿈 속에서 ‘바람벽(Wind wall)’이 소설 제목으로 떠올랐다. 바람벽은 집의 둘레나 방의 칸막이를 위해 흙을 발라 만든 벽이다. 진흙을 뭉개 바른 벽이라도 얼어붙은 몸 녹일, 따스한 구들목이 있는 땅을 찿아 얼마나 헤매였던가. 바람은 동에서 서로 서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분다. 그대와 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허물 수 없다 해도, 바람은 수시로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장편소설 바람벽 베스트셀러 소설가 소설 제목 어머니 장례식